아메데오 모딜리아니 Amedeo Modigliani
(1884.07.12 - 1920. 01.24)
# 이탈리아 태생 프랑스 화가
1906년 프랑스 파리로 이사를 갔습니다. 모딜리아니가 예술의 중심지인 파리로 이사를 간 시기는 예술계에 큰 흔적들을 남긴 지노 세베리니(Gino Severini)와 후안 그리스(Juan Gris)도 프랑스로 온 시기였습니다. 그는 후에 제이콥 앱스타인(Jacob Epstein)과 친구가 되었고, 둘은 모두가 예술을 즐길 수 있는 스튜디오를 설립하는 것을 목표로 했습니다.
모딜리아니는 몽마르트르에 있는 무일푼의 예술가들이 모여 사는 라 바토-라부아르 지역에 작은 스튜디오를 빌렸습니다. 비록 몽마르트의 예술가들 4분의 1이이 빈곤에 시달렸지만 모딜리아니의 스튜디오는 르네상스의 복제품과 플러시 천으로 휘장하여 나름 괜찮은 인테리어를 갖추고 있었습니다. 그의 외모 또한 빈곤에 찌든 모습이라기보다 말쑥하고 깔끔한 인상이었습니다. 그는 보헤미안 화가처럼 보이려고 갈색 코듀로이, 주홍색 스카프, 커다란 검은 모자를 쓰는 등 노력을 기울렸습니다.
처음 파리에 도착했을 때, 그는 정기적으로 어머니에게 편지를 썼고, 아카데미에 콜로시(Académie Colarossi)에서 그의 누드를 스케치했으며, 와인을 즐겼습니다. 그 당시 그를 아는 사람들에 의하면 다소 내성적이고 사회성이 조금은 떨어지는 편이었다고 합니다.
# 보헤미안 화가
파리에 도착한 지 1년도 안 돼 그의 품행과 명성은 극적으로 달라졌습니다. 말쑥하고 감각적인 화가의 이미지에서 유랑자들의 왕처럼 변해버렸습니다.
시인이자 저널리스트인 루이스 라투레트는 그가 이렇게 바뀐 후 그의 스튜디오를 방문했는데, 전과는 달리 르네상스의 복제품들이 벽에서 떨어져 나가 있고 플러시 휘장들도 흐트러져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모딜리아니는 이미 알코올 중독자에 마약 중독자가 되어 있었고, 스튜디오에도 그가 처지한 상황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었습니다. 그는 작업실에 걸려있던 모든 부르주아적인 흔적들을 없애었고 자신의 초기 작품들마저도 없애버렸습니다.
모딜리아니는 파리에 도착한 뒤로는 보헤미안 화가처럼 보이려고 자신을 가장했고 점점 빈곤에 시달리게 되면서 알코올과 마약에 중독되어 피폐한 삶을 살았습니다. 알코올과 마약에 중독된데는 자신이 병인 결핵을 자신을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 감추기 위한 수단이었을지도 모른다고 추정됩니다. 1900년까지 프랑스에서 사망의 주요 원인인 결핵은 전염성이 높았고 치료법도 없었고, 이를 가진 사람들은 두려워하고, 배척당했습니다. 모딜리아니는 동료들과 함께하여 성공을 거두었기에 결핵 환자로서 고립되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그는 신체적인 고통을 완화하기 위해 술과 약을 완충제로 사용했고, 이는 그의 활력을 유지하도록 도왔고, 계속해서 작품을 창작할 수 있도록 도왔습니다.
1914년 경부터 더욱더 술과 마약에 빠져들었습니다. 수년 간 완쾌와 재발을 반복했었는데 이 시기는 그의 결핵 증상이 악화되어 병이 진전 단계에 이르렀음을 알리는 시기였습니다.
그는 우트릴로와 소틴과 같은 예술가들의 작업실을 찾아가 동료들로부터 작품에 대한 인정과 검증을 구하기했습니다. 그의 움직임들은 보헤미안적인 환경 속에서 더욱 두드러졌습니다. 그는 반복적인 행동들을 일삼았습니다. 압생트와 마약을 즐겼고 술에 취해 사교모임에서 가끔 알몸을 드러내곤 했습니다.
파리에서 35세의 나이로 사망하였습니다. 그는 빈센트 반 고흐의처럼 사후에 작품들이 인정을 받게 되어 비극적인 화가의 전형이 되었습니다.
1920년, 프랑스의 시인이자 평론가, 작가인 안드레 살몬은 모딜리아니가 압셍트를 즐겨 마시고 마약을 했었다는 사실을 알리며 그의 고유한 스타일과 천재성에는 압셍트와 마약이 영향력을 발휘했을 것이라는 평가를 했습니다. 이에 예술가들은 모딜리아니의 뒤를 잇기 위해 그를 모방하여 마약을 하고 보헤미안의 삶을 추구했습니다.
일부 학자들은 모딜리아니가 방종함에 매몰되지 않고 자기 파괴를 하지 않았다면 훨씬 더 높은 예술적 경지에 올랐을 가능성이 높았을 것이라 주장합니다.
# 작품
파리에서의 초창기 시절 모딜리아니는 맹렬한 속도로 작업에 몰두했습니다. 그는 끊임없이 스케치를 하였고 하루에도 백 점이나 되는 작품들을 제작했습니다. 하지만 그 많은 작품들 중 상당수는 마음에 들지 않는 이유로 훼손되었거나, 잦은 이사로 잃어버렸거나 만났던 여자친구들에게 선물로 주었습니다.
초기에는 프랑스 화가인 앙리 드 툴루즈 로트렉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나 1907년 경에는 폴 세잔의 작품에 매료되었습니다. 결국에는 자신만의 고유한 스타일을 만들어 냈는데 다른 예술가들과 비교할 수 없는 스타일이었습니다.
그가 26세 때인 1910년, 러시아 시인 안나 아크마 토바를 만나 처음으로 진지한 사랑을 했습니다. 그들은 같은 건물에 스튜디오를 가지고 있었어서 쉽게 가까워질 수 있었습니다. 그녀는 유부녀였지만 모딜리아니와 사랑에 빠져 둘은 불륜을 저질렀습니다. 안나는 키가 크고, 검은 머리에 창백한 피부, 회색빛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모딜리아니의 완벽한 미적 이상형으로, 서로에게 완전히 몰두하였습니다. 그러나 1년 후 안나는 다시 남편에게 돌아가고 맙니다.
(출처 : Wikip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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