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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노트] 나는 토끼처럼 귀를 기울이고 당신을 들었다 | 황경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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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토끼처럼 귀를 기울이고 당신을 들었다

황경신

 

 

 

 

<다시 읽어 볼 타이밍>

이 책을 대하는 태도 또한 제목과 같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주의를 기울인다면 까맣게만 보이던 활자가 의미를 되찾고 그 깊이를 헤아려나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책 편식이 심하던 시기, 시/에세이 코너를 지나치다 제목에 이끌려 책장 앞으로 다가갔었습니다. 우연히 이 책과 마주하고 첫 장을 펼쳐 들고 마지막 장을 덮기까지 이틀 정도 걸렸습니다. 하지만 책을 완전히 소화해내지는 못했습니다. 그래서 한 번 읽었습니다. 처음 읽었을 때보다 문장이 눈에 더 잘 박혔습니다. 그리고 한 동안 책장을 덮어 두었고 4년 뒤에 그때 작성해두었던 독서노트를 꺼내어 보았습니다. 4년이라는 시간이 흘러가는 동안 저는 좀 더 무르익어 갔고 차곡차곡 쌓아온 경험의 축적이 생각과 가치관의 깊이를 달리했으며 문장을 대하는 태도 또한 성숙해져 있었습니다. 다시 이 책을 펼쳐볼 때가 돌아왔구나 싶고, 이제야 비로소 책을 소화해낼 수 있겠구나 하는 자신감도 듭니다. 

저는 조율, 떨림처럼 빨리 지나가는 것들, 무거운 혀, 그의 마지막 문장, 문신 편을 가장 좋아합니다.

 

(출처 : 책 나는 토끼처럼 귀를 기울이고 당신을 들었다.)

 

 

 

# 조율 

'도'인 당신과 '미'인 내가 한 음 높아지고 한 음 낮아져 레가 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은 당신의 소리로 빛나고, 나는 나의 소리로 당신의 세계를 밝혀, 멜로디는 화음이 되고 화음은 노래가 되고 노래는 시가 되어주기를, 이렇게 우리 하나의 세계에 담겨, 어깨를 나란히 하고.

 

 

# 떨림처럼 빨리 지나가는 것들 

나는 순간적으로 움찔하며 숨을 죽인 채, 순간적으로 지나가는 그 느낌을 붙잡으려 했다. 그리고, 순간이 지나갔다. (중략) 어쩌면 그 떨림의 여운이야말로 우리에게 무언가를 창조할 수 있게 해주는 에너지일지도 모르겠다. (중략) 바로 그런 식으로 우리는 떨림의 순간에서 떨어져 나와, 어리둥절한 채, 점점 큰 원을 그리며 번져가는 물결에 밀려, 다시는 되돌아갈 수 없는 중심을 그리워한다. 내가 이만큼 이쪽으로 밀려오는 동안, 당신은 저만큼 저쪽으로 밀려가는 중일 것이다. 그리고 돌멩이는, 최초의 돌멩이는 이미 바닥으로 가라앉았다. 마치 처음부터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는 듯이.

 

 

# 무거운 혀

너의 사랑도 나의 사랑도 믿은 적 없으니, 나는 배신을 당한 것이 아니라는 말 정도는 해도 괜찮았을 거라고 생각하며, 하지 못한 말들이 무거운 혀끝에 매달려 돌처럼 단단해지고, 그 무게로 조금 휘청거렸지만, 걸을 수는 있었다. 멀어질 수는 있었다. 

 

 

# 그의 마지막 문장

당신의 시선은 나를 향해 있었으나 눈길이 부딪히려는 순간마다 묘하게 어긋났다. 그것이 무엇이든 들키지 않으려는 의도가 당신에게 있었는데, 그 의도가 내게 중력으로 작용했다는 것이 문제였다. 

심장이 비정상적으로 뛰게 되면 뭔가가 과해지고 뭔가가 모자란다. 말을 아껴야 할 때 너무 많은 말들을 해버린다거나, 손을 거두어야 할 때 옷깃을 붙잡는다거나. 그런 식으로 한 번 템포가 뒤틀리면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저항하는 것에 익숙하지 않은 나는 결국 토끼처럼 귀를 기울이고 당신을 들었다. 당신이 감추고 있는 것들이 출렁이다 문득 수면 위로 솟아오르는 찰나를 낚아채기 위해.

세상의 모든 로맨스는 로맨티시스트에 의해 창조될지 몰라도, 로맨티시스트는 로맨스를 위해 희생하지 않는다. 

 

 

# 문신

아름다운 순간이 지나간 후 슬픔에 잠겨있을 용기가 없다고, 나는 고백했다. 그는 희미하게 미소를 지으며 조용히 일깨워 주었다. 모든 아름다운 것들은 슬픔을 동반한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면, 어떤 아름다움은 그 슬픔을 지속시킬 용기 또한 지니고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을 거라고. (중략) 지독하게 흐려진 세계 안에서, 나는 당신이 봄을 가지고 오는 모습을 보았다. 지속이란 움직이지 않는 것이 아니라 끝없이 변화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그때 알았다. 왔다가 가는 봄이 영원이며 피었다 지는 것이 영원이며 그리하여 사랑이 영원이라는 사실을 그제야 알았다. 수십 번의 봄을 덧없이 맞고 보낸 후, 어쩌다 당신을 만나, 비로소, 어쩌면 마지못해.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묵혀있던 감성을 일깨워냈을 뿐인데 이렇게 마음이 풍족합니다. 저는 이 책을 아주 열심히 괴롭힐 것입니다. 손때도 잔뜩 묻힐 것이고 책장을 수천번이나 뒤적일 것이며 까만 활자 위를 형형색색 물들일 것입니다.   

읽고 또 읽고, 책장이 닳고 닳아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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